상서 길에서 만나는 ‘소리’

상서는 ‘소리’로 다가들곤

어둠이 빨리 오는 만큼 그리움도 서둘러 내리지. 찾아올 사람이 있으나 아무도 기다리지 않기로 하면서, 기다림이 없는 길 위로 흔들리는 몇 냉이꽃을 응시하면서, 가는 길마다 그토록 깊은 그리움으로 오는 어둠을 열어 상서로 접어드는 길.
내게 상서는 ‘소리’로 다가들곤 해. 얼마 안 되는 메타세콰이어 늘어선 가로수길 지나면 들리는 소리. 무슨 소리라고 딱히 규정할 수는 없어. 소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벌떼가 윙윙대는 소리 같기도, 혹은 까마귀가 떼 지어 나는 소리,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 같기도 하거든. 그것이 어떤 소리이건 동그란 원음을 주는 힘이 있는 소리임에는 분명해. 멀리 퍼져나가도 살아 있는, 고정시키는 기운이 있는 원음 말이야.
만물이 열매를 맺고, 인간이 아이를 낳아 모든 것을 화합하고 단결시켜 통일을 이루는 소리. 또한 만물이 합쳐지는 소리라고 해야 할까. 부안은 가는 곳마다 왜적과 맞서 싸우다 목숨 잃은 애국지사들을 만날 수 있어서일지도 몰라. 그 소리가 웅웅대며 상서를 휘도는 듯하여 숱하게 지나치는 곳이지만 한 번쯤은 귀 기울여 소리의 안을 살펴보고 싶어져. 한 번도 닿아본 적 없는 저 소리의 깊숙한 곳으로.

 

돼지터라고 한다 해도

상서면의 소재지 마을은 특이하게도 ‘돼지터’, 혹은 ‘저기(猪基) 마을’이라고 불려. 마을 지형이 돼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고, 도곡(桃谷) 이유(李瑜) 선생이 거느린 의병들이 크게 군진을 치고 싸운 ‘대진터’, 왜놈을 물리친 곳이라는 ‘퇴왜진터’라는 설도 있어. 만약 짐승인 돼지를 뜻하는 것이라면, 유달리 소에 관한 지명이나 터가 밀집돼 있는 상서로서는 좀 억지스러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어. 상서의 소재지 마을은 변산으로 향하는 첫머리라고 볼 수 있거든.
변산은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의 와우형(臥牛形) 혈 터가 많아. 상서면 청림리에 쇠뿔바위봉이 그러하고, 소의 무릎 형상을 한 우슬재가 그러하다면, 변산은 그 자체로써 누워 있는 소의 몸통에 속하지 않을까. 능가산(愣伽山) 울금바위가 꼭 소의 귀 형상을 하고 있는 우이봉(牛耳峰)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야. 그 귀로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들을 다 듣고 있는 것만 같거든. 물 비린 숨, 알처럼 둥근 숨을 들이 내쉬면서 말이지.
하지만 짐승인 돼지터라고 한다 해도 어쩔 것인가. 돼지는 수기(水氣)를 띠고 있는 짐승 중 으뜸이므로, 상서는 화기(火氣)로 인한 해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을 머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일진대. 그 힘이 왜적과 맞서 대결할 수 있는 용맹성으로 나타났는지도.

 

타루비와 기적비

1597년 정유재란 때 부안에 침입하여 온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도곡 이유 선생 부부. 누가 두드려 깨우지 않아도 산은 일어서는 모양이야. 이유 선생이 의병을 모집하여 청등벌에서 싸우다 전사하자, 그 부인인 부안 김씨는 죽창으로 무장한 뒤 병졸들을 이끌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갔다고 해. 그리고는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고. 그들의 의로운 죽음은 상서면 감교리 청등에 검은 비로 세워져 있어. 상서면 소재지 지나 얼마 안 가 우측에 있는 ‘타루비’가 그것이야.
옛날 중국 진나라 양양태수 양우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가 바로 타루비였다지 아마. 그 비를 보기만 하면 백성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적군이 물러간 뒤, 시신을 찾지 못해서 옷가지와 신발만으로 겨우 초혼장을 지내게 된 이유 부부의 넋이 아직도 청등에 머물러 있기라도 한 것일까. 이제 막 어두워지려는 하늘이 캄캄한 굴속처럼 여겨지는 것은.
타루비는 도로가에 세워져 있으나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조금은 안타깝기도 해. 푸른 하늘의 무상함을 아는 듯 비 바로 뒤에 구불텅하게 자라 있는 소나무며, 멀리로 능가산이 알맞게 받쳐져 있는 것이 보기 좋은 곳인데도. 그 앞 자갈밭에 핀 노란 민들레꽃이 늦은 봄의 바지춤을 추켜올리고 있는 때에 이르러서야 부안 땅에 흐르는 역사의 통한을 보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어쩌면, 나 혹은 우리가 한 번쯤은 볼 것을 보아야 할 때에 이르렀기 때문일지도 몰라. 내가 사랑을 하지 않으면 꽃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법이니까.
타루비 옆으로 가면 상서면 가오리에서 태어나 항일의병 선봉장이었던 김낙선 의사의 기적비(紀績碑)를 만나볼 수 있어. 29세 젊은 나이에 구국의 일념으로 선봉장이 되었던 김낙선 의사. 45세에 순국한 그의 삶을 한 세월 지나 현 시대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차마 가늠하기 힘들지만, 나라 뺏긴 원통함을 못 이겨 총 몇 자루 들고 이 땅을 사수했던 의사의 뜻을 알고자 하니 다시 한 번 입안에서 단침이 돌아. 그 역시 뿌리의 근원이 주는 감로라고 생각해. 하늘의 젖, 천유(天乳) 말이야.
그러고 보니 지금은 28수(宿) 별자리 중 저수(低宿)가 뜨는 때야. 24절후 중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穀雨)에 볼 수 있는 별자리, 저성(低星). 말(斗)을 기울여 쌀의 분량을 재는 형상으로 네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방 청룡의 가슴 부위에 해당되지. 이 저성 옆에는 검은 빛을 띤 한 개의 별이 또 있어. 하늘과 땅의 기운이 합하여 내리는 감로를 주관하는 ‘천유(天乳)’라는 별. 잘 보이지 않아 사람들은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못난이 별이지. 그러나 과분하게도 달디 단 그 하늘의 젖을 받아 마시며 나는, 참 오래도록 김낙선 의사 기적비 앞에 서 있었어. 허랑한 꿈속에 있는 세상을 관통해가는, 깊은 고요함과 함께.

 

이 땅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함성 소리

부안읍에서 상서면 소재지를 거쳐 감교, 청등을 지나면 유정재에 이르지. 북으로는 상서, 남으로는 보안 남포리까지 바닷물이 들어 군사적 요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유정재. 그곳에 호벌치 기념비가 있어. 개암사에 가기 전 낮은 오르막길에 사자상과 함께 세워져 있는데, 치열했던 역사를 안고 있어서인지 표정이 참 무던해 보여. 지금은 수많은 생과 사 속에서 낮과 밤들이 태어났다가는, 일없이 사라져가는 걸 보고 있기라도 하는 듯한.
이 역시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이들을 기리기 위한 전적비야. 이탁과 승려 만세(萬世), 채홍조와 두 아들 채명달, 채경달 등 수많은 이들이 감교리 청등 고개에서 치열한 싸움 끝에 전사했다고. 이로써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 의병으로 인해 전라도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왜군이, 정유재란 때에 이르러서야 전라도에 들어와 값을 톡톡히 치룬 셈이야.
그렇게 전사한 호벌치 순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신 전적비 아래의 민충사. 새 한 마리 노니는 걸 사려깊이 하고 있는 민충사 처마 밑에서도 소리가 들려. 타루비든, 김낙선 의병비든, 호벌치 전적비든 상서에서 나는 소리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몸을 일으킨 수많은 이들의 함성인지도 몰라. 그들이 치러냈던 전쟁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 들에, 이 고개에, 이 길에 핀 꽃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산 저 산 밟히지 않고 건강하게 피어난 민들레꽃이며, 냉이꽃과 같은 작고 여린 들꽃들. 매순간 너무나 많은 미시적인 번뇌와 싸우며 사는 우리는, 그 흰 꽃 내음을 당최 알 수 없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계획을 세워 도전하는 것은 세간 법일 뿐, 자연의 법과는 다른 바가 있을 거야. 깨닫기 위한 것도, 완성되기 위한 것도, 백 점짜리가 되기 위한 것도 아닌 자연의 법. 그냥 그러하고 그러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할 뿐인 것.

 

바위가 살아 있다고 여겨지는

묵념으로 민충사에 인사를 하고 한 바퀴 돌아 조금 더 가면, 드디어 개암사 뒤로 8백 미터 올라가 우뚝한 울금바위를 볼 수 있지. ‘울금’이란 말은 ‘위용이 있고 크다’는 ‘위큼’에서 비롯되었어. 커다란 쇠귀를 열어 저 아우성을 다 듣고 수천 년을 살아왔을 바위. 그래서일까. 바위가 살아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금방이라도 어떤 거대한 기운이 바위를 뚫고 하늘까지 치솟을 것만 같은 위용이 느껴지거든. 능가산은 본래 호남의 삼신산으로, 천왕이 내려오신 곳이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들만도 한 일이야.
능가산 즉 변산을 두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천부(天府)’로 불렸다고도 해. 산물이 풍부한 땅을 가리켜 천부라 했다는데, 순창의 회문산과 같이 이십사 혈이 있어서인지 “살아서는 변산이고, 죽어 묻힐 곳은 순창”이란 말이 있을 만큼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왔지. 조선시대 어사 박문수는 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부안을 지목했어. ‘생거부안’이라는 말도 그 때 생겨난 거라고 하더군.
능가산 정상부의 이 울금바위에는 동굴이 셋 있는데, 거대한 암봉 아래에 넓은 바위굴을 복신굴이라 부르고 있어.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을 이끌던 복신이 머물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또한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한 이곳이, 삼국 통일기에 백제 부흥군이 마지막까지 항전한 주류산성이야. 주류산성은 아직도 그 위치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아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개암사 주변이 실제 주류성이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실히 고증되고 있어.

 

복신굴 옆에 원효방의 뜻은

복신굴 옆에 백제 유민들의 아픔을 달랬던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원효방도 있지. ‘다래미절터’ 또는 ‘다람쥐절터’라고도 부르지. 세간의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는 곳이자, 마음을 비우고 신에게 올바른 것을 묻는 방. 즉 미륵신앙의 성지가 되는 불사의방(不思義房)이야.
세 평 정도밖에 안 되는 불사의방 밑에는 물이 고이는 작은 웅덩이가 하나 있어. 몸을 받아 다시 온다면, 나 또 무엇을 지금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곰곰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 속에서 호랑이 무늬를 하고 양 턱에 긴 수염을 단 부안종개라도 한 마리 튀어 오를 것만 같아. 원래 물이 없어 곤란한 곳인데, 전하는 말로는 원효대사가 이곳에 수도하기 위해 오고 나서부터 샘이 솟아났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야.
백제의 마지막 소망이 존재하였던 곳. 승리한 나라인 신라의 대표적 고승 원효대사가 와서 이곳에 절을 중창하였다는 것부터가 범상치만은 않은 일이야. 그러고 보면 개암사와 울금바위가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중심지 중 하나로 발전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거야. 원효대사가 수도한 이래 수많은 수도자들이 이곳에 찾아와 새 세상으로의 개벽을 꿈꾸었던 것도 그렇고. 한반도를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으로 볼 때, 변산은 남성의 성기에 해당하고 울금바위는 낭심이 된다는 풍수적 얘기가 헛되이 들리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지.
나는 원효굴을 볼 때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조금은 억지스러울 수 있겠으나 원효대사가 해골 속에 담긴 물을 마신 장소가 혹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역사적으로 정확히 명시되지 않은 곳이다 보니 원효방에 앉아 있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잘못은 아닐 거야. 백제의 패망, 그리고 옛 왕국을 되살리려던 유민들의 꿈이 있는 곳. 모든 관점상의 쟁점을 모순적 대립이나 서로 옳다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를 상응하는 관계로 보게 한다는, 화쟁(和諍) 사상을 편 원효대사의 깨달음은 이 땅을 진정한 하나로 만들고자 했을 테니까.

 

나는 여전히 ‘소리’를 듣고 있어

찰나도 멈추지 않는 흐름, 곧 흘러 통하는 것, 살아 있음은 무엇인가. 어차피 세상은 혼자 먹는 밥상처럼 쓸쓸하기만 한 것을. 쓸쓸해져서 먼 곳을 바라보는 그리움인 것을. 세상에 고정된 것은 없어. 오직 흐름이 있을 뿐. 시발점도 종점도 없이, 온다 간다도 없이 그냥 여여하게 걸림 없이 흐르는 유수 같은 흐름. 도무지 썩은 내 난다고 말할 사이도 없는, 그 흐름을 보며 나는 여전히 ‘소리’를 듣고 있어. 소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벌떼가 윙윙대는 소리 같기도, 혹은 까마귀가 떼 지어 나는 소리,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 같기도 한.
상서는 소리로써, 둥근 톱니가 서로 맞물려 돌아갈 때에 어디에서 끊어지고 어디에서 이어진다고 할 수 없듯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있어. 우리가 찰나 찰나 생활하듯이 그렇게. 우리의 생활만이 아니라 전체가 그러하게. 밖에서 안으로 들어와 마음속에 쌓이는 게 아니라, 한 생각을 따라 일어나 채곡채곡 쟁여진 것. 그러다가 인연 따라 하나하나 다시 나오게 되는 것. 전쟁과 평화, 과거의 역사와 현재까지도 하나로 뭉뚱그려져서 말이지. 그 소리 듣고 싶다면 어디 한 번 상서에 가볼 일이야. 오늘처럼 그리움이 서둘러 내리는 날에는 더욱.

 

/김형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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