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새벽길 나서다’

박홍규 화백의 ‘동학농민혁명이야기’

 

▲을미년 3월 29일(2014, 52X46)

1895년 을미년 3월 29일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

이 날 전봉준은 사형 언도를 받고 마지막 일갈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2시 동지였던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향년 41세였다. 그 날은 하루 종일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봉준이 온다1-전봉준 새벽길을 가다(2012)


전봉준! 새벽길 나서다

이 사내가 빠진 우리의 근현대사는 어찌 했을까? 5척의 작달만한 키로 19세기 말 격동의 조선반도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사람!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격정적으로 뜨겁게 온 몸을 던진 혁명가! 부패한 봉건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갈망하며 꿈꾸었던 사람!! 거센 외세의 침탈에 정면으로 바람 앞에 맞섰던 사람!!! 조선 백성들은 그를 ‘전녹두’라 부르며 사랑했고, 아낌없이 생사고락과 운명을 같이 했다. 청수한 얼굴과 정채 있는 미목, 엄정한 기상과 강장한 심지를 가진 이 위대한 대영걸 전봉준이 빠진 우리의 현대사는 맹탕일 뿐이다. 그가 신 새벽 눈 내리는 배들 평야를 뜨거운 입김 불어가며 가고 있다. 초저녁에 살며시 기어든 어느 사랑방에서 밤새 호롱불 아래 정세를 나누고 밀담을 주고받다 뜬눈으로 새벽길을 나서는 이 사내는 무슨 생각으로 눈길을 뚫고 가고 있을까? 그의 어깨 위에 조선 백성의 운명이 걸려 있음을 이때는 알았을까? 그는 준비된 혁명가였다.

 

▲백골징포도(2014, 37×120, 목판화)

백골징포도

19세기 후반 조선은 통치 질서의 파탄 속에 농민들은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다. 호남은 곡창이라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다른 지역보다 극심한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한양에서는 ‘자식 낳아 호남에서 벼슬살게 하는 게 소원이다’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간난아이를 군적에 올려 군포를 징수하던 황구첨정과 이미 사망하여 백골이 된 사람들까지 군포 징수자 명단에 올려 백성을 수탈하였다. 한 해 농사 지어 각종 세금 뜯기고 나면 농민의 70% 정도가 식량조차 마련하기 어려웠다. 1892년 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악랄한 수탈은 그 수량과 방법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조병갑의 탐학은 고부민란의 도화선이 되었고 혁명의 시작이었다.

 

▲일어서는 두승산(2008, 32X65)

일어서는 두승산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나서야
백성이 한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갑오년 새해가 밝아오자 고부 두승산에 봉화불이 타올랐다. 1894년 1월 11일 전봉준이 이끄는 1,000여 명의 고부 농민들이 항쟁에 돌입했다. 고부관아를 습격해 아전을 징치하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장한 후, 수탈한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를 허물었다.

 

▲녹두장군(1989, 70×32)

 

녹두장군

“우리가 해산하면 장두(將頭)는 죽는다!”
고부민란 당시 이제 그만 해산하자는 소리에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얼마 후 그는 더 큰 장두가 되어 농민들 앞에 섰다. 전봉준은 그렇게 녹두장군이 되었고 사람들은 친근하게 그를 전녹두라 불렀다.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 탁월한 농민군 지도자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무장에서 기포하고 백산으로 진출하여 격문과 강령을 발표하였다. 「백산창의격문」은 근현대를 통틀어 가장 빼어난 최고의 선전선동문이다. 바야흐로 혁명의 시작이다.
농민군은 황토현과 황룡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내쳐 달려 전주성까지 점령한다. 무장기포 한 달여 만의 일이다.

 

▲후천개벽(2014, 40X94)

후천개벽도

전주화약 이후 호남은 집강소 통치가 시작되었다. 집강소는 우리 역사 최초로 민중이 국가권력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치와 자립의 민주주의를 실천했던 기구다. 집강소 폐정개혁 12조항은 조선백성들에게 천지가 개벽하는 것과 같은 환희와 축복으로 받아들여졌다. 「후천개벽도」는 땅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땅이 되는 세상, 후천개벽 대동 세상에서 환하게 웃음짓는 백정, 여성, 과부, 기녀, 아이, 농민 등을 새겨 넣었다. 그 찬란했던 해방 세상도 단지 몇 개월로 끝이 났다. 다시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왔다.

 

▲바람 앞에 서다(2014, 45X105)

바람앞에 서다

청나라 파병을 구실로 일본군은 고종을 포로로 잡고 꼭두각시 개화 내각을 구성했다. 조선반도는 청나라와 일본군의 대리 전장이 되었다. 9월 평양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은 수백 년 조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국이 물러가자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일본의 조선 점령이 시작되었다. 이제 일본의 침략에 맞설 세력은 조선 천지에 농민군 말고는 없었다. 농민군은 나락이 익기만을 기다렸다. 갑오년 9월에 전봉준 장군은 거대한 바람 앞에 서서 조선의 운명을 건 결단을 내려야 했다.

“큰 바람 물 말아 일으키니 숲의 나무가 꺾인다.
대도(大道)는 날마다 멀어지니 웅걸한 인재는 그 누구인가.
장수는 검을 만지고 눈물을 흘리며 마냥 슬퍼한다.
우수수 낙엽은 지고 빗물 새어 이끼가 생기도다.”
<비개(悲慨), 이광사 시(詩)>

추수를 끝낸 농민군들이 삼례에 모이기 시작했다. “왜병이 장차 이를 것이다. 일이 심히 급박하다!” 마침내 최시형은 총동원령을 내렸다. 남북접 연합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에 맞선 제2차 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우금치(2012, 한지에 채색)
▲아! 우금티(2014, 종이에 채색)

아! 우금티

갑오년 당시 가장 처절한 싸움이었던 우금치 전투의 상황을 실감해 보고자 나는 2014년 눈 내리는 11월 말, 우금치와 곰치고개에 올랐다. 눈은 내리고 추위에 손발은 얼어붙고 고개를 오르고 내리다 수차례 낙엽 위에 쌓인 눈에 미끄러졌다. 분발 사이로 희미하게 능선이 보인다. 그게 마지노선이었다. 그 능선에 몸을 감추고 있다. 농민군이 다가오면 일제히 일어나 일본군은 연발총과 최대 사거리가 2,000m에 이르는 미제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다 소총으로 갈겨댔다.
내가 미끌어 넘어진 자리가 바로 농민군이 희생된 자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농민군은 말 그대로 농민군이었고 지닌 무기도 대부분 칼, 활, 죽창 그리고 사거리가 100보 정도에 지나지 않는 화승총 정도였다. 이런 굿은 날씨에는 화승총도 무용지물이다. 농민군은 쓰러진 시체를 넘으며 수십 차례나 진격하다 밀리기를 반복했다. 전봉준 장군은 붉은 휘장의 가마를 타고 전투를 독려했지만 일본군의 최신 병기와 화력 앞에 우금치 고개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처절하고 뼈아픈 패배였다. 퇴주하는 농민군을 향해 일본군은 조준 사격하며 추격했고 온 산야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

 

▲피노리 가는 길(2014, 45X105, 목판화)

피노리 가는 길

원평, 태인 전투를 끝으로 군대를 해산한 전봉준 장군은 12월 혹한의 눈발을 뚫고 수하 세 명과 함께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피체되었다. 늙음도 피해간다는 피노리(避老里). 그는 왜 피노리로 향했을까? 혁명에서 패한 그가 택한 건 절망의 도피길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공초에서 한양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올라가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는 전녹두가 피노리 가는 3일 동안 만났을 사람들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장군님, 너무나 원통합니다! 얼른 재기하시어 불러만 주십시오!”
눈 내리는 ‘피노리 가는 길’은 혁명의 패배에 따른 도피길이 아니라 새로운 준비, 새로운 결의를 세우기 위해 가는 숙명의 길이었을 것이다.

 

▲대둔산항쟁 김석순 접주像(2014,55X90,목판화)

 

대둔산 마지막 결사항전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금산, 진산, 고산 농민군들은 동짓달 그믐에 대둔산에 올라 600m 고지 암벽에 3채의 산채와 돌로 엄호 벽을 만들고 유격 항전에 돌입했다. 1895년 2월 18일 일본군 다케우치(武內眞太郞)가 작성한 「대둔산 부근 전투상보」다. “돌격 후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한병들이 이들을 모두 죽였으며 겨우 한 어린 소년만을 남겼을 뿐이다. 적 25~26명이 여기에 틀어 박혀 있었는데…. 28~29세 쯤 되는 임신한 부인이 총알에 맞아 죽었다. 접주 김석순은 한 살쯤 되는 여아를 안고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 들다 암석에 부딪히어 박살이 나 즉사하였다.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기록에 남은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항전 기록이다. 아이를 부둥켜안고 절벽 끝에 선 김석순 접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는 재작년 갑오년 1월 말에 눈이 쌓인 대둔산 항전지에 올라 혁명군 영령들께 술을 올렸다. 그리고 판화에는 너무 마음이 아파 꽃도 피워 보지 못한 그 한 살배기 여자아이의 강보에 모란꽃을 새겨 넣었다. 무병장수 행복을 상징하는 모란꽃을…

 

 

 

 

▲동학농민군 마지막 밥을 받다(2014, 110X56, 목판화)

 

 

 

동학농민군, 마지막 밥을 받다

장흥 전투를 끝으로 조선반도는 무자비한 학살에 따른 통곡과 암흑의 반도가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동학역도들은 씨를 말려라”는 초토화 명령을 내렸다. 여자, 아이 할 거 없이 온 동네가 소개되었다. 대학살이었다. 감옥에 갇힌 농민군은 그나마 처지가 나았다. 처형을 앞 둔 농민군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밥을 받았다. 고봉밥에 간장 종지 한 그릇. 얼어 터진 손으로 밥숟가락은 들었으나 엄동설한에 불안과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을 처자식 생각에 목이 멘다.

 

 

▲동학농민혁명렬사 이소사像(2015, 950X700, 목판화)

 

 

 

조선의 잔 다르크, 장흥 이조이(李召史) 열사

시호(時乎) 이내 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이 칼 저 칼 넌즛 들어 이 놈의 썩은 시상
단칼에 절단내어 씨원한 시상 한번
구경이나 하여보세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장흥은 갑오농민전쟁에서 최후의 격전지다. 이방언 장군의 지휘 하에 12월 1일 재봉기하여 벽사역, 장흥부성을 점령하고 그 기세로 강진현과 강진병영까지 파죽지세로 점령했다. 장흥부성을 공격할 때 말을 타고 진두지휘 하는 여성 지도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조이(李召史) 열사다. 장흥 전투에서 박헌양 부사를 사로잡아 목을 쳤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당시 일본 「국민신문」 기사는 다음과 같다.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에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傾城之色)의 미인이라 하고 이름은 이소사라 한다. 말을 타고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위에서 지휘를 하였다고 한다.”
이조이 열사는 석대들 전투 이후 체포되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문을 받다 나주로 압송되어 생을 마감한다.

 

 

▲동학농민혁명군 장흥부 덕도 탈출도(2015)

동학농민혁명군, 장흥부 덕도를 탈출하다

장흥 석대들 전투는 혈전이었다.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고 남쪽으로 퇴각하며 옥산촌전투와 월정전투를 치른다. 장흥전투는 1주일간의 승리와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의 32일간의 가장 긴 토벌기간으로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일본군들의 추격으로 흩어졌던 농민군 500~600명이 대거 덕도로 운집하자 16세 소년 윤성도를 비롯한 덕도 주민들은 야밤을 이용하여 남해안 주변 섬으로 모두 분산 피신시켰다.
「동학농민혁명군 장흥부 덕도 탈출도」는 전투에 패한 동학농민군이 절망과 불안 그리고 다음 투쟁에 대한 결기를 다지며 범선을 이용해 탈출하는 장면이다. 이후 이들은 한 명도 붙잡히지 않았고 덕도 주민들 또한 토벌 과정에서도 모두 무사했다 한다. 조선강점 이후 이들은 아마도 의병투쟁으로 무장 항일투쟁으로 섬에서 혹은 어느 산하에서 이름도 없이 산화해 갔을 것이다. ‘의병의 절반은 비류(농민군)’라는 당대의 기록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농민군의 덕도에서의 조직적 탈출은 농민전쟁의 패배가 아닌 투쟁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완의 동학농민혁명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직도 진행형이다.
한번 크게 패배하여라!
그리하여 영원히 승리하라!

/ 박홍규(농민화가)

<부안이야기 14호>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