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에서 꽃피운 해양문화의 번성지

  부안문화의 특징 고려 때의 대 문장가 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서기 1200년 초에 궁재(宮材: 궁중에서 쓰일 목재)의 벌목 감독관으로 변산(邊山)에 와있으면서 변산은 물론이요 보안, 부령 (당시 지금의 부안은 保安縣과 扶寧縣 두 고을로 나뉘어져 있었다.) 두 고을을 두루 편력하며 그 아름다운 풍광에 놀라 찬탄하고 순후한 습속에 젖은 감회를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시문으로 남겼다. 이때 그는 부안지방의 역사와 생활습속을 총평한 한 수의 시도 남겼는데 이러하다. 습속(習俗)은 단자족(蛋子族)과 비슷한데 고을 역사는 잠총국과 같음을 뉘라서 믿으랴 習俗例多如蛋子 縣封誰信自 叢 이는 ‘생활의 습속(문화)은 옛 중국 남방의 해변 …

[부안이 낳은 시인 신석정의 시세계]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일제 때 양심지킨 시인, 해방 후 치열한 저항의식 표현한 작품 남겨 부안이 낳은 시인 신석정(辛夕汀:1907~1974).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목가시인’ 또는 ‘전원시인’이라는 수사가 붙어다닌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리 험한 세상일지라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원초적 내면의 향수를 자극하는 시어들을 찾아 일생을 향토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석정은 간재 전우의 제자로 한학자였던 부친 신기온(辛基溫)의 3남2녀 중 차남으로 부안읍 동중리 ‘노휴재’ 뒤편의 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때부터 그의 집안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안읍에서 한약방을 해오고 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석정(錫正)이었다. 그가 태어난 날이 …

원불교 새회상의 산실 변산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은 변산 사자동 봉래정사로 들어와 약 4년 동안을 머물면서 장차 펼 새 회상의 교리를 정리하고 제도 등을 연구하였으며 교전의 일부를 직접 집필하였다. 내변산 사자동 일대의 제법성지가 바로 원불교 새회상의 산실인 것이다. 구도의 길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 사진)은 1891년 3월 27일(음력)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촌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4남 1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진섭(鎭燮)이었고 원불교를 창립한 후 제자들이 높여 받들어 부르는 존칭은 소태산 대종사(大宗師)이다. 그가 탄생한 시기는 5백년 왕조가 무너져 가고 외세의 …

정유재란 격전지 부안-유서깊은 싸움터 유정자 고개

  부안에 정유재란 때 부안사람들이 왜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격전지가 있다. 호벌치(胡伐峙) 전적지(지방문화재 제 30호)가 바로 그곳이다. 조총이란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왜군을 상대로 1개월 간을 끌며 밀고 밀리는 혈전을 치렀다는 것은 이 지방 사람들의 기개를 한껏 드높이는 일이었다. 유서깊은 싸움터 유정자 고개 상서면 감교리 개암사 입구에서 남쪽으로 도로를 따라 약 4km쯤 가면 해발 50여미터의 나즈막한 고개가 나온다. 유정자 고개라고 부르는 이 고개는 높이로는 대단하지 않지만 지형적으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곳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유명하다. 그 까닭은 이 고개의 남북 양 …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

  부안에서 지킨 조선 유학의 마지막 절개 공자(孔子)는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道不行 乘 浮于於海:<논어>, 공야장편)” 라고 말하였다. 한말의 격동기에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는 참담한 좌절 속에서 공자의 이러한 말을 좇아 서해 절해의 고도 왕등도로 들어갔다가 부안의 계화도에서 일생을 마친 도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말의 거유(巨儒), 간재(艮齋) 전우(田愚)이다. 전우(田愚)는 1841년(헌종7) 8월 13일 지금의 전주시 다가동에서 아버님 담양(潭陽) 전씨 청천공(聽天公) 재성(在聖)과 어머님 남원 양(梁)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청천은 충청도 홍주에서 살다가 전주에 이르러 그를 …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부안이 낳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 이매창의 시세계 부안읍의 진산인 성황산에 있는 서림 공원 입구에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매창(梅窓)의 시비가 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 시비에 적힌 시조> 이화우(梨花雨)에서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이별이 일순간 천리 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운 임에게로 향하고 있다.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고 지은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 실려 전하는데 이별가로서 이보다 더한 절창(絶唱)이 또 없을 듯하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

한국 초상화의 마지막 거장 채용신이 그린 “간재 전우” 초상

    간재(艮齋) 전우(田遇, 1841~1922)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났으며 스승 임헌회를 따르며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여러 벼슬을 제수 받고도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 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수구파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개화파로부터 전우를 죽여야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전통적인 도학의 중흥만이 국 권회복의 참된 길이라고 여기고 부안, 군산 등지의 작은 섬에서 학문을 폈으며, 72세부터 82 세에 죽을 때까지 계화도에 정착하여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그는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 최후의 정통유학자로 추앙 받고 있다.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은 …

未聞金堤西津, 聞於扶安東津

    지금의 동진대교가 있기 전에는 그 자리에 나루가 있어 배로 강을 건너야만 했다. 이곳은 부안군내에서도 대표적 나루로, 이 나룻터에는 뱃사공이 나룻배와 더불어 연중 대기하고 있다가 길손들을 건네주는 일을 해왔다. 그들은 세습하여 뱃사공 노릇을 하였는데 정기적, 항시적으로 이용하는 주민들이 거두어 주는 뱃새경과 외지인들에게서 받는 선임(船賃)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뱃새경은 이용하는 횟수에 관계없이 근처 주민들은 한 가구당 1년에 보리 1말, 또는 5되씩 2회에 걸쳐 부담해야 했다. 이렇듯 동진나루의 수입이 꽤 좋다보니 그 관할권을 놓고 부안의 원님과 김제의 원님 간에 송사가 벌어졌다. 동진강이 …

항일독립투사 아나키스트 백정기 의사

  나의 구국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日帝)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평화 위에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공생공사(共生共死)의 맹우(盟友) 여러분 대륙(大陸)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주시오 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중국 상해에서 백정기 의사가 1933년 3월 17일 의거한 날 침략거두 아리요시(有吉) 일파 도륙을 모의하며 동지들에게 남긴 말이다.     6월5일,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에서는 항일 독립투사인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1896-1934 ) 의사 의열사 준공식 및 영정 봉안,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행사는 백씨 종친회와 유족대표, 영원면 주민들, 정읍시민 들, 광복회원, 보훈처 …

내소사 고려동종의 용뉴

  우렁찬 종소리의 근원, 범종의 용 용은 장식 위치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범종을 메달기 위한 목적으로 종 위쪽에 만들어 놓은 장치를 종뉴라 하는데, 대부분 용의 형상을 취하고 있어 용뉴라고도 한다. 그런데 종 위에 앉아 있는 용을 특별히 포뢰(蒲牢)라고 한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에 의하면 포뢰는 용의 또 다른 화현(化現)이다. 포뢰는 바다에 사는 경어(鯨魚 ; 고래)를 가장 무서워하여 그를 만나면 크게 비명을 지른다고 한다. 종은 그 소리가 크고 우렁차야 한다. 옛사람들은 포뢰 모양을 만들어 종 위에 앉히고 경어 모양의 당(撞)으로 …